전시평론
작품의 명제이기도 한 정창균의 ‘명경지수(明鏡止水)’는 동양정신에서 말하는 무위(無爲)에서 한층 진보된 현대사회의 혼탁성에 대한 깨끗한 정신을 추구한다. 맑은 거울은 사람의 심성과 살아가는 가치를 본래의 모습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철학적 의미이다. 때문에 책을 그리기 보다는 책 위에 있는 기물을 그리고, 책과 기물보다는 거울에 비춰진 상태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다. 외적으로 보면 정물을 그대로 옮겨낸 듯하지만 개인의 감각과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한국인 특유의 감성적 미술로 환원된다.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의미하거나 자연의 경관을 실내에서 그려내는 일반의 정물화와는 달리 실재와 가상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릇에 담긴 과일들, 책 위에 놓인 꽃들을 보통의 정물화라 이해하면 그의 작품에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미술시간에 억지로 그려보았던 과일과 꽃, 화병 따위의 상황과 비견해서는 곤란하다. 그의 정물화는 단순히 자연물을 연출하여 그려낸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을 그리고 거울에 비춰진 환영을 재차 그리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서 자신과 자신을 바라보는 타자속의 자신이 하나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낸다. 아무리 잘 그려낸 꽃이라도 진짜 꽃이 아니듯 맑은 거울속의 꽃 역시 진짜가 아니다.
변별력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자연스러운 연출보다는 책이나 생소한 기물위에 꽃이나 과일들을 배치한다. 자연스러운 구도의 감상보다는 정신적 공간을 중시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을 통해 내면적 감성과 감정을 포함시켜 현대인들의 정신적 피폐함과 일상의 위태로운 상황을 정화시키고자 노력한다. 때문에 자연물과 흡사하게 모방해내는 극 사실과는 적당한 간극이 유지된다. 거울에 비춰진 정물에는 전통적 형이상학적 담론 속에서 詩·文·書·畵를 비롯한 전체 문화를 보편적 정서로 하는 한국인의 기분과 감성이 들어있다. 감각적으로 그려낸 정물화가 아니라 무위(無爲) 혹은 맑음을 추구하는 진정한 마음으로서의 정신성이 포함되어진 감성의 기명절지(器皿折枝)로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의 전통적 화법(畵法)중에 기명절지(器皿折枝)란 말이 있다. 조선후기부터 본격화된 정물화의 영역이다. 그림의 소재로는 선비들이 주로 사용하던 책장이나 문방구류, 고가구 등을 그리면서 거기에 책과 전혀 상관없는 길상적(吉祥的) 의미를 지닌 꽃이나 과일들을 첨가시켰다. 과거 선비가 자신의 서재를 꾸미거나 등과, 다산, 부귀 등을 생각했던 것이 본래의 책가도라 한다면 정창균의 명경지수는 혼탁한 정신의 맑음을 추구하는 현대적 책가도라 부를 만하다. 보통 사람들과 쉽게 소통되는 그림 속에 오묘한 철학 정신이 버무려져 맛있는 감성의 영역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다양한 정신적 영역의 확장이다. 보이는 것에서 출발하여 보이지 않는 감성의 법칙을 찾아내어 본래적 감성을 추구한다. 기물과 자신의 대립에서 오는 상태를 인정하고 정신성의 법칙을 공부해 가고 있는 동양정신이다. 모방된 기물들이 거울을 통해 또다시 모방하면서 대상의 시간을 정지 시킨다. 거울에 비춰진 공간은 무한의 공간이 된다.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것으로 표현되나 개인적인 것을 넘어 일상의 감성이 내포된다. 때문에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직접적 관심이 유도되고 있다.
정창균만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는 시각적 자연스러움을 수용하면서 無爲自然과 같은 정신적 구도를 잘 발생시킨다. 사과나 장미꽃 등과 기물에 반쯤 가려진 두꺼운 책들을 통해 숙성된 정신을 그려낸다. 거울의 무한한 여백의 공간위에 놓여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를 만끽한다. 감상과 상상을 위한 여백의 공간을 거울로 대치한다.
최근 팝아트나 극 사실주의, 가벼운 이야기 꺼리가 포함된 가벼운 작품들이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에 몰려있는 탓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창균의 정신적 활약은 새롭게 드러난다. 현대미술에서 말하는 조형과 관련된 직관과 이미지 번역의 문제보다 화면에 숨겨진 감정과 획득되는 정서의 작용에 의해 음미된다. 공간구성이 독특하게 도드라져 자신의 감성과 사상체계에 따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적 긴장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다. 같은 대상을 모방하더라도 모든 모방은 화가의 단초에 의해 새롭게 단장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정물화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한편으로는 소통을 위한 보통의 정물화와의 타협점을 찾아낸다. 그려지는 대상의 속성은 유지하면서 대상과의 소통, 더 나아가 대중의 정신적 담론을 야기 시켜 나간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것이 기물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겨내면서 자신의 감성과의 대립점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킬 조형요소가 여기에 있다.
장자(莊子)에 따르면 ‘거울이 흐려 보이면 먼지가 앉은 것이지만 맑게 보이는 것은 먼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오랫동안 현자(賢者)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맑아져 허물이 없어진다.’ 하였고 덕충부편(德充符篇)에는 ‘사람의 모습을 흐르는 물에는 비춰볼 수 없지만 고요한 물에는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 때문에 고요한 것은 맑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맑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정창균이 추구하는 예술관의 출발점을 여기에 두고 있다.
정창균(1968~)의 ‘명경지수(明鏡止水)’시리즈는 화면 가득 펼쳐진 책, 그 위에 올려진 꽃과 과일, 그리고 그 정물들을 비추는 바닥의 거울이 수평과 대칭의 엄격한 구도 아래 극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으로 특별하다. 그의 작품에서 받은 인상은 어느 나른한 오후의 휴식 같은 한가로움과 이른 아침의 차가운 기운이 머물러있는 한켠의 공간처럼 하나의 그림 속에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느낌이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지닌 것처럼 이성과 감성이 대칭선을 사이에 두고 교차한다. 책 위에 놓인 싱그러운 과일과 생명의 표정을 지닌 꽃이 고단한 일상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줄 만큼 자극적이라면, 바닥의 거울은 차가운 감촉과 무한의 공간감이 정신을 흔든다. 이러한 상반된 분위기는 그가 작품에 담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의 정물화가 단순히 대상의 사실적 재현이나 시각적 즐거움을 찾는데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실제 그의 작품세계는 극사실적 묘사의 정물과 바닥거울에 반사된 정물을 통한 실재와 환영, 이성과 광기, 정신과 물질, 성(聖)과 속(俗) 등과 같이 상반되지만, 그 경계가 모호한 것들의 관계에 관한 동양 철학적 시각의 접근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형식은 서양적이지만 내용은 동양적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는 서양의 나르시시즘과는 본질에서 다른 명경지수라는 화제(畵題)로부터 기인한다.
명경지수는《莊子》의 ‘덕충부편(德充符)’에 실린 고사성어로 “사람은 흐르는 물에 비추지 못하고, 고요한 물에만 비출 수 있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능히 다른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고요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능히 다른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며 누군가의 마음이 그쳐 있는 물처럼 조용하다면 사람들은 그를 거울삼아 모여들 것(정용선 지음『장자, 마음을 열어주는 위대한 우화』간장. 2011. 248-257참조.) 이라고 제자를 일깨워 주었던 공자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정창균의 작품세계는 공자의 혜안(慧眼)을 시각적으로 옮기는 것에서 출발한다. 화면 구성상 거울을 정물의 옆이나 뒤가 아닌 바닥에 놓은 것도 명경지수를 독법(讀法)하여 거울을 물과 동일시한 의도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책 위에 놓인 정물보다는 그 정물을 비추는 거울에 부여한 작가 정신이다. 사실 거울 속에는 어떤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대상이 놓이면 비추고 또 사라지면 거울로만 남을 뿐이다. 거울은 인위적으로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모습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비춘다. 이 점에서 작품 속 거울은 허정(虛靜)한 마음과 같다. 고요한 물이나 거울처럼 텅 빈 마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비친 존재적 실상을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다.
정창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명경지수의 의미는 사진처럼 정묘하게 표현한 극사실적 기법과도 연계된다. 그의 그림 속 과일, 꽃, 나비, 책 등은 하나같이 외형적으로 완전한 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외형적으로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단지 형(形)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히려 사물의 존재적 실상과는 무관할 수 있다. 형은 어차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거나 유전하는 존재의 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외형의 모습을 따르는 것은 허상을 쫓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림이 실재인지 그림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극단적 환영주의, 즉 눈속임〔trompe l’oeil〕에 빠지는 것은 실체를 감추는 껍질일 뿐이다.
여기에 관해서 작가는 화면가득 실재보다 몇 배의 크기로 확대한 이미지를 통해 회화에서 재현이 허상임을 밝히고 있다. 동시에 정밀하게 표현된 정물보다 거울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그 형체를 반추하고 있는 미완결의 형체가 사물의 본질이고 존재적 실상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거울에 반영된 이미지는 시점상 불가능하다. 마치 존재적 실상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완벽한 형을 갖추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거울은 사람의 정신과 마음에 감응된 이미지만을 반영하는 것이다. 극사실로 묘사한 화면 상단의 이미지가 물질의 세계라면 무한의 공(空)을 지닌 거울은 정신적 내면을 상징한다.
정창균이 지금까지 발표한 명경지수시리즈는 외형적으로는 얼핏 특별한 변화가 없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외형적 변화보다 늘 정신적 측면에서 변화를 거듭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특정 대상을 소재로 사물의 본질에 천착하는 경우와 같이 그는 명경지수라는 주제를 통해 회화와 사물의 본질에 접근했기 때문이다. 아직 명증한 자기 확립을 이루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적어도 자기표절(self-plagiarism)에서 오는 매너리즘을 항상 경계하며 일관성을 유지해온 그의 활동에서 커다란 시각적 변화보다는 정신적 성숙에 무게를 두고자한 작가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최근 작품의 소재와 색조에서 나타난 작은 변화와도 관계한다.
최근작은 색채가 지극히 부드럽고 차분한 톤이 주조를 이룬다. 2007년~2011년의 작품들이 강렬한 색과 뚜렷한 외형에 집중한 측면이 강했다면, 이후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차분한 파스텔 색조가 화면을 주도한다. 절제된 색과 여백으로 욕심을 비웠다. 그래서 지난 세월과 함께 색감이 무르익은 것처럼 숙성된 편안함이 시각적 피로를 덜어준다. 색이 인간의 정서와 감성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느끼게 하는 변화이다.
색조보다 더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책이 중심적 소재로 확대된 점이다. 재질, 두께, 형태, 모양 등 외적 특징으로 조형성을 살리고, 예술관련 서적부터 성경, 위인전집 등의 내적 특성을 부각시켜 책의 정신성을 강조했다. 책은 단순히 지식을 얻고, 앎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아니다. 모든 책이 진실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내용을 책을 통해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상상의 세계를 만나기도 한다. 사물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따라 다르듯 책도 읽은 사람의 마음과 정서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정창균은 책이 지닌 무한한 세계를 지식의 탐구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자신의 꿈과 희망을 키울 수 있는 대상, 혹은 자신의 존재적 실상을 성찰할 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싱그러움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자연물과 묵묵히 인간의 심성을 숙성시키는 책을 통해 삶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라는 작가노트의 글귀처럼 책은 자신의 내부, 즉 정신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심상(心相)의 거울이다. 화려한 꽃이나 싱그러운 과일은 언젠가 시들고 상할 수밖에 없지만, 책은 마음과 정신 속에 영원히 남는다.
곰브리치는『예술과 환영』에서 ‘미술의 언어가 이룩한 진정한 묘미는, 미술가가 실재의 환영을 창조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거장의 손을 거치면 이미지가 투명해진다는 사실이다. 가시세계를 새롭게 보도록 가르치는 과정에서, 거장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영역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환영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E.H.곰브리치, 차미례옮김『예술과 환영』열화당. 2003. 359.)
고 했다. 회화와 인간의 심리학적 관계에서 미술의 진정한 힘을 발견한 곰브리치의 명쾌한 통찰은 정창균이 작품에 담고자 하는 미적 가치와 연결 지을 만하다. 궁극적으로 정창균의 명경지수는 마음의 덕(德)을 키우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맑은 숙기(淑氣)와 무심(無心)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의 존재적 실상을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예술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작가정신이 창작의 깊이만큼 투명해지는 것은 작가나 감상자에게 즐거운 일이다.
정창균의 <명경지수>는 극사실의 정물화로 조형적 형식의 문제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마음 상태를 비추는 그림으로 자리매김한다. 마음으로 보고 거기에 비춰진 상을 지각함으로서 마음의 상태를 깨닫는 그런 그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명경지수>가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내용으로 기울어진 개념미술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작품은 무엇보다 감각의 움직임을 중시한 경우이며, 감각을 통해 직관에 이르게 하는 즉 ‘느껴서 통하게’ 하는 지각의 형상회화이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명경지수>는 이 지각을 위해 극명한 모방의 표현기법을 활용하여 사념이 없는 깨끗하고 허령한 마음을 은유한다. 그러니 <명경지수>의 명료한 극사실 화면은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에 다름 아니다. 주관적 감정의 찌꺼기가 먼지처럼 부유하지 않는 명징한 거울인 셈이다. 그래서「장자」의 ‘덕충부’편에서,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추어 있는 물을 거울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명경지수> 연작이 사물에 대한 허정하고 명료한 지각으로 ‘마음’ 즉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직관의 혜안을 여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주희는 이 마음의 동정(動靜)에 대해서 두 가지 단계로 구분해서 말한 적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이제 그 두 단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朱子語類」, 권65, ‘易1’편을 보면, 「역전」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인용돼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다”(寂然不動 感而遂通). 여기서 주희는 먼저 우주론적인 맥락으로 부동(不動=陰)과 동(動=陽)을 설명하다가 논의를 계속 전개하면서 마침내는 ‘마음’에 관련시켜 해석을 한다. 곧 아무 형체 없이 실재하던 마음(陰)이 외부 사물이 다가오자 그에 반응하여 움직이고 감응하는 마음(陽)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첫 번째 단계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음’이고, 두 번째 단계는 ‘느껴서 마침내 통함’이 되겠다. 특히 후자에 대해, 「朱子語類」, 권72, ‘易8편’에서 “感은 사물이 와서 나를 느끼게 하는 것이며, 通은 자기가 그 느낀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라고 부언하여, 마음작용이 곧 지각(知覺)작용임을 확인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주희는-혹은 그와 견해를 공유한 주변 신유학자들도- ‘마음’을 음양의 기로 간주하며, 음양의 감응으로 지각의 작용을 한다고 이해했던 거라고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필자가 생각하기에, 마음에는 어떠한 선험적인 관념이나 원리도 없으며, 외부 사물과 기를 통해 감각, 감응함으로서만 그것에 관한 지각의 앎을 얻을 수 있다는 경험적 입장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주희가 객관적 감각경험의 지각과 직관인식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경험론적 신유학자인 장재로부터 ‘심통성정’(心統性情)론을 수용하긴 했어도, 주희는 만물(유형, 무형)의 본성을 理로(性卽理)로 보는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물과 만나서 감응하기 이전의 고요한 마음을 마음의 근원이자 본성인 理로 간주하지 않았을까 라는 추론을 해보게 된다. 그가 마음에 내재한 性(본성)인 理가 마음의 동정과 상관없이 이미 구비되어 있고, 理가 마음의 감응(氣)에 있어 내적 계기임을 주장하던 겸리기의 학자인 바에야, 그 같은 고려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더군다나 그가 氣보다는 理를 철학의 중심으로 삼았던 선행 학자인 정이로부터 ‘理가 우주 만물의 감응 작용의 근원’이란 선험적 인식론의 영향도 받았기 때문에, ‘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의 의미해석에서 지각론만을 계속 유지하며 ‘마음’을 궁구할 수는 없겠다. 그러므로 주희가 마음의 존재론에서는 일원론을 표방하면서도 마음의 인식론에서는 이원론의 입장을 취한다고 보아, 다음과 같이 마음 작용을 이해하는 편이 옳겠다. 마음의 동정에 대한 두 단계인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음’과 ‘느껴서 마침내 통함’에서, 전자의 단계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가능태로서 理의 차원으로 그리고 후자의 단계는 마음이 드러나 작용하는 현실태로서 氣의 차원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그렇다고 보면 이와 연관하여 H.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설명한 생기론(生氣論)이 역시 머리에 떠오른다. 마음도 생명의 기운처럼 발생한다고 본다면, 마음이 어떤 형체를 갖기 전의 정적이고 고요한 상태는 마음의 잠재태로 그리고 마음이 발생하여 四端七情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행하면 그래서 <명경지수> 연작의 형상으로 드러나면, 이는 마음의 현실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다”라는 마음의 작용은 곧 잠재태에서 지각 가능한 현실태로 이행하는 마음의 사태 바로 그것이겠다.
‘적연부동과 감이수통’(寂然不動 感而遂通)은 맑고 고요한 <명경지수> 연작에서 가장 잘 감득할 수 있는 마음작용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음작용의 원인이랄까 혹은 <명경지수> 연작이 그려져야 하고 또 관객이 감상해야 하는 어떤 까닭으로서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필자는 이에 대한 답이 앞에서도 말한 주희를 비롯한 신유학자들이 궁구한 理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데아의 실재도 아니고 기독교적 진리도 아니며, 사회적 이념도, 개인의 욕망도 아닌 理는, 어쩌면 고대 서양에서 언급하던 그 코라(chora, khôra), 우주 만물의 생성 이전에 있던 모태와도 같은 근원이자 모든 생명에 분유된 본연의 법칙적 에너지이기도 한 그 코라가 아닐까 한다. 동양의 음양론의 개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음과 양으로 구분되기 이전의 태극의 범주로 비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코라와 태극 그리고 理는 무형이고 잠재태이며 부동성과 운동성을 모두 내재한 하나의 근원이고, 어떤 명목으로도 완벽하게 정의될 수 없는 그 무엇이므로, 세 가지는 모두 동연적(coextensif)인 개념들로서 상호 비교될 수 있겠다. 이로서 본고에서는 정창균의 <명경지수> 연작에서 우리가 느끼는 저 맑고 고요함, 허령함의 감각이 지향하는 차원을 존재의 근원이자 본연의 원리인 理의 차원이라고 정리해두고자 한다. <명경지수>에서 직관하게 되는 것은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변함이 없는 마음의 理, 마음의 본래 면목이다.
理는 인간과 만물에 분유되어 있고 모든 존재는 理를 본성으로 함축하고 있다(理一分殊). 그래서 우리는 외부 사물을 지각할 때 그 사물과 동일한 리(엄밀히 말해 分殊理)를 마음 내부에서 직관할 수가 있다. <명경지수>에서도 경험적 감각지각을 하면서, 감상자는 궁극의 理를 직관하여 마음의 본 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느끼고 통하는 것은 氣에 해당하는 지각 작용이되, 마음의 발행으로 감응하면 그 대상의 본연의 이치를 감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다’(寂然不動 感而遂通)에서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음’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닌 無가 아닌 것이다. 보이지 않는 만물의 理가 그 안에 이미 빽빽하게 구비되어 있음이며, 그리하여 외감(외부의 감각)이 작용할 때, 리의 내적 계기는 활연관통하여 마음의 지각작용을 이루는 것이 된다. <명경지수> 연작은 이 같이 내부의 理가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는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라고 생각된다, 또한 필자는 이 점이 정창균 작가의 극사실의 정물화를 그 외의 다른 극사실 화가들의 작품과 차별화시키는 중요한 변별점이라고 여기고 있다.
정창균의 <명경지수> 연작은 정물화이고, 불어로 말하자면 ‘nature morte’ 즉 죽은 듯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보여준다. 그러나 극명한 극사실의 표현기법 덕분에 부동의 이미지는 생생한 리얼리티의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정적이고 고요한 정물 이미지가 티 없이 맑고 고요한 생각, 의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의 몸속에서 활연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는 마음의 발동이다. 관객은 <명경지수> 앞에서 이렇게 느끼고 반응하며, 자연스럽게 각자 나름의 감동이나 기억 혹은 내면 성찰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매혹적인 감각적 지각과 고요한 마음의 성찰이 <명경지수> 연작 앞에서 유독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왜일까? 따지고 보면 사실 극사실 회화의 감각적 효과는 상당히 저돌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압박하듯이 다가오는 것이 상례이다. 그 앞에서 여유롭고 차분한 사색의 깊이로 빠져드는 일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그 만큼 극사실 회화는 관객의 감각의 움직임을 빠르게 하고 의식과 지각작용을 피동적이 되게 만든다. 예컨대 고영훈의 <이것은 돌입니다>(1974) 작품은 캔버스의 규모에 상관없이 관객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시선 앞으로 던져진 듯한 돌에 대해 관객은 여유로운 마음의 작용을 누릴 수 없다. 돌의 즉물적인 등장과 표제의 직설적인 문구가 그 동안 구상회화가 주던 주관적 감정에의 몰입, 추상화의 현실을 떠난 관념성 뿐 아니라 지각의 능동적 작용마저도 접어 버리게 한다. 이후에도 대부분의 한국 극사실주의 1세대 화가들은 극사실의 정밀묘사를 하면서 소재에 매우 가깝게 접근한 나머지 즉물적인 화면을 만들어내곤 했다. 대상이 된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배경을 없앴는데, 이런 배경의 희생은 물상만으로 가득 채운 화면을 낳아 결국 회화를 즉물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를테면 대상에 대한 투시 거리가 짧아서 확대된 대상을 미시적으로 정밀하게 그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물성의 감각이 절로 강해진 것이다. 이렇게 배경이 사라지고 물상만이 확대된 극사실회화는 외물에의 감각 의존도를 높여서, 내감보다는 외감이 더 중요한 감각체험의 외재화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극사실주의 1세대 화가들에 비해 이십 년 후 극사실 회화에 합류한 정창균은 선행 작가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들이 지나간 궤도를 그대로 따라 밟고 있지는 않다. 불긍거후(不肯車後) 즉 남의 뒤를 추종하지 않겠다는 도전의식이 작용해서일까. 그는 대상을 묘사할 때 프로젝터, 에어브러시 같은 기계에 의존하기보다 대체로 손과 붓으로 세밀한 묘사를 하며, 실재 장면의 감각을 위해 시 초점이 맞추어진 부분과 바깥 부분들에 대한 명확도에서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한 차이를 두기도 한다. 그래서 그가 완성해낸 화면은 선행 극사실회화나 제3세대 극사실회화가 주는 차갑거나 냉랭한 기계적 느낌이 아니라 인간의 눈과 손길의 느낌이 어른거리는 이미지로 부각된다. 특히 그는 화면 중앙에 놓인 정물의 소재 뿐 아니라 그 주변 배경 공간도 함께 그림으로서, 선행 극사실주의 화가들과 결정적으로 거리를 둔다. 크게 보면 역시 근접 이미지이긴 하지만 초근시안적인 접근이 아니라 대상에서 약간 물러난 거리에서 바라본 장면이기 때문에, 대상 안으로 함몰된 시야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사물과 배경 공간이 함께 그려져서 동시에 지각되면, 감상자는 어떻게 반응하게 되는 것인가. 관객은 화면 안에서 사물만을 주시하지 않고, 사물과 배경 공간, 두 요소를 일시에 지각하게 되고 두 요소의 관계를 의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 화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로 둘러싸인 사물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물을 보는 방식 그대로 보여진다. 우리는 현실에서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몸을 포함한 외부세계를 바라보는데, 우리의 몸과 세계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하나의 거대한 공간(몸 밖의 또 하나의 거대한 몸),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객관의 대상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시선이 아니라 보는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을 하나의 유기적인 세계로 바라보는 시선이 된다.
<명경지수>에서 사물과 주변 공간을 함께 포착한 장면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현상학적 시각을 그대로 모방한 장면이다. 더더군다나 극사실의 표현기법이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추호의 의심도 없이 일상의 시각과 동일한 시각장을 느끼도록 한다. 그리하여 <명경지수>를 보는 관객은 그림 속의 정물과 그 주변 공간을 자기 몸의 지향적 시선과 통일된 전체로 의식하게 되며, 이로서 정물 이미지에 대한 지각은 일상의 지각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명경지수>에 대한 이 지각은 몸의 의식 즉 마음의 작용을 발동시킨다. 몸 외부에서 감각할 뿐 아니라 몸 내부에서도 반응하고 수용하며 직관하는 상태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이다’라고 즉물적으로 가리키거나 문학적 서술의 재현을 하는 경우, 이 같은 몸 내부의 의식지향은 단축되거나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학에서 보자면 의식의 억압이라고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명경지수>에서는 마음이 외부에서 감각하고 내부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외감과 내감의 이중적 차원의 활동이 아무 걸림 없이 기능하게 한다. 외부세계에 있는 대상을 보고서 감각하며, 몸 안에서도 그것의 맑고 고요함에 반응하는 느낌의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굳이 말로 설명하자면 이 느낌의 체험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몸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체험이다. 외부의 대상을 느끼고 알아보는 감각은 외재적 체험이고, 마음이 내부에서 느끼는 감각은 수용하고 포착, 확인하는 내재적 체험이다. 관객의 시선을 대상에 함몰시키는 극사실회화는 내재적 체험보다 외재적 체험의 확장을 요청하는 편이지만, <명경지수> 연작의 경우에는 외재적 체험보다 내재적 체험을 더 요청하는 편이라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도 F. 베이컨의 강렬한 내재적 체험의 회화와 비교한다면, <명경지수> 연작은 외재적 체험과 내재적 체험이 경험의 층위에서 서로 상충하지 않고 양립하며, 감각의 자율성에 타격을 주지 않는 균형을 이루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寂然不動 感而遂通)는 마음작용을 표상하는 회화로서 <명경지수>는 또한 우리에게 한국적 감성의 발현을 경험하게도 한다. <명경지수> 연작에서 관객들은 서양 유화를 감상하던 경험과 달리 한국 문인화를 감상할 때처럼 대상을 관조하는 고요한 마음의 지각상태를 체험한다. 그림의 소재 차원에서 비교하자면, 책, 꽃, 향로 등 서재의 일상용품들을 배치한 전통 문방도(文房圖)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런 민화식 정물화는 평면적 도해와 길상구복의 상징 등으로 인해 그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명경지수>의 한국적 감수성을 밝히자면, 비록 형상면에서 거리가 있어도, 사군자 정물화를 언급해야 하겠다. 빙설을 뚫고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 그림 앞에서 우리는 그림의 내용보다는 매화에서 지각할 수 있는 정신적 분위기에 더 마음이 동한다. 이 꽃나무가 누구의 나무이며, 꽃이 왜 더 일찍 혹은 더 늦게 피었냐고 묻지 않고, 이 나뭇가지가 왜 이쪽 혹은 저쪽으로 꺾여 있느냐고 따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정보-이야기가 되는 내용-는 순선한 감각과 지각을 흐트러트린다. 맑고 고요한 매화 이미지는 보는 이의 마음에 빙설을 뚫은 기개라든지 지조, 청아한 아름다움 혹은 새 생명의 신비를 비추어주고, 관객의 심중에서 자신이 지각한 바를 직관하게 한다.
같은 연장선상에서 정창균의 작화태도도 묵묵하게 속으로 완성된 마음을 담아내는 문인화가의 태도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상적인 소재와 극사실의 형식을 선택한 작가이긴 하지만, 자신의 감정과 사념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의지적 이성으로 제작과정 내내 예리한 감각과 직관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조선시대 사대부 화가가 획(劃)의 태세(太細), 장단, 필압의 강약을 조절하는 가운데 정신적 직관으로 문인화를 그려냈던 것처럼, 그 역시 감정의 분출에 온 몸을 내맡기는 일을 경계하며, 의식의 날을 세우고 몰입하여 화면 공간을 조형해내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전통 문인화에서처럼 서권기(書卷氣)나 문자향(文字香)을 피어 올린다는 뜻은 아니다. 평소 이론이나 담론보다 실천적 제작에 몰두해 온 그는 자신의 회화에 관념적 의미를 삽입하거나 논리적 추론을 앞세워 개념화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주력하는 것은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겠는데, 첫째 극사실의 능수능란한 묘사로 감정의 흔들림 없는 극명한 리얼리티를 제시하는 일, 둘째 그러면서도 실제 대상에 함몰되지 않은 채 실제를 총체적으로 감지하고 파악하는 일, 셋째 지각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마음(心)의 주체로 바꾸어 마음의 상태를 그리는 일이다. 그 중에도 그에게 중요한 궁극의 과제는 역시 리얼리티의 회복이 아니라 앞에서 말했던 ‘반응하고 감응하며 動하는 마음’,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느껴서 마침내 통하’는 마음을 그 맑고 고요한 본 면목대로 표현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제3세대 극사실 화가들이나 네오-팝 작가들이 보여준 현대 산업사회의 도시문화, 상업문화의 이미지 표현과는 큰 거리를 두고 있는 것임이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도 동시대의 디지털 이미지와 미디어 이미지의 감성과는 다른 정창균 작가의 감성이 문제시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이 차별점은 결국 그만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했음을 증명해주고, 더 나가서는 감각론과 동양 지각론에 근거한 한국 극사실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국제화되는 방향성을 확보한 지점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볼펜과 싸인 펜으로 선을 긋고, 색 연필로 칠하고, 지점토와 색료 등으로 애써 공들여 완성한 작품의 표면을 그는 사포로 문지르고 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사포의 예리한 날에 하얀 줄이 가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에 온 몸이 쑤시는 답답한 순간들을 보내야 한다. 그리고 캔버스 안에 작은 박스를 만들어 그 안에 다양한 오브제와 미니어처의 형상을 배치하고, 그 모양에 맞춰 캔버스의 틀도 꼼꼼하게 짜 놓는다.
사각의 캔버스로 회화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한다는 오랜 강박관념은 그의 의식 속에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둥그런 모양의 캔버스들도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렇게 완성한 작품으로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가.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해시계의 눈금을 의미하는 선들이 원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는 돌이나, 철모 속의 백록담이나, 녹슨 통을 뚫고 나온 꽃이나, 오랜 축음기에 바늘을 올려놓아 음악이 흐르는 장면을 비롯하여 작품들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해시계의 눈금이 새겨진 선 주위의 바탕색은 사포로 갈아 빛바랜 듯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중앙의 이미지들은 원색으로 그려져 있어 시각적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눈금의 의미를 부연 설명해 주기 위한 <time escape-창밖>, <time escape - springtime 1,2,3>의 작은 박스안의 이미지들은 화면에 실재감을 주는 꼴라주로 흑백사진과 칼라사진을 대비시키고 있다. 즉 흑백사진과 칼라사진의 이미지는 사진 속의 풍경을 관찰하면 영화의 촬영 기법에서 보듯이 동일한 장소의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다시 말해 우리 의식 속에서 칼라 사진은 현재의 모습으로, 흑백 사진은 과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ime escape - 창밖, 160x80cm Mixed Media on Canvas 2005 (박스부분1)
표면의 색과 질감, 그리고 박스 안의 이미지들은 눈금 중앙의 이미지와 눈금 주변의 이미지를 대비시켜 그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눈금 주변의 색과 질감과 이미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것들을, 그리고 중앙의 색과 질감은 시간의 흐름 속에도 변화하지 않는 것들을 대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은 시계의 초침이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흐르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time escape-창밖>의 박스 안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현재에서 과거로 나아가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과 같이 작가의 주관적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Time escape - 창밖, 160x80cm Mixed Media on Canvas 2005 (박스부분2)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어린시절에 보냈던 과수원을 걸으면서 끊임없이 촉발되었듯이 작가 정창균도 <time escape-lunch>에서 보듯이 어린시절의 난로 위에 도시락을 데우는 장면을 떠올리며 그 의식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은 <time escape-memory1,2,3,4>, <time escape1,2,3,4,5>의 작품에서 보듯이 작가에게 자기 자신만이 간직한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무는 나르시스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time escape-파랑새1,2>, <time escape-DMZ-Soul2>의 중앙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그것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음양의 화합 속에서 생겨나는 의식들이며, 녹슨 철판을 헤집고 솟아나는 꽃처럼 인위적인 것들과 대비되는 자연적인 것들로 연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은 <time escape-stone1,2,3,4,5,6,7>의 자연석들을 상징화한 돌의 이미지들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며, 밑줄이 그어진 단어들로 자연에서 인위적인 것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화장지로 표현한 <time escape-사랑나무1,2>의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의식을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의식 현상의 탐구를 통해 작가가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999년의 첫 개인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준 성찰의 문제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공허와 소외, 불안감에 기조한 인간의 피폐화되어가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어진다.”라고 첫 개인전의 서문에서 미술평론가인 최병식이 평한 글처럼 물질문명의 포로가 된 인간의 숨 막히는 질식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물질문명으로 인한 그 의식의 충격을 작가는 2004년의 글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고향에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겨났다. 몇 달 전에 보았던 비포장길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 자리에는 자동차만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커다란 변화가 생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막상 체험을 하고 나니 실감이 난다.”
물질문명은 그 이기와 함께 그 변화의 속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욕망이 살아 숨쉬는 의식 속에는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회색지대9903, 1999>에서 보듯이 그 회색의 벽 앞에서 알몸으로 몸부림치며 절규하는 한 남자의 모습과 같은 이미지를 떠오르게 할지도 모르며,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이에게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첫 개인전 이후 작가는 물질문명으로 인한 인간 의식 현상의 흐름을 시간의 풍경과 함께 반추해보기 시작한다. <time escape,2002>의 풍경은 화려한 궁전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어린시절에 한번쯤 꿈꾸던 미래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궁전의 모습과는 달리 회의적인 회색의 바탕화면을 통한 화면 구성에서 보듯이 그 욕망을 통해 도달한 미래의 시간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time escape-perfume, 2004>에서 그는 시계를 의미하는 도상에 이미지들을 대조시키며 그것과 대립된 의식과 마주한다. 엉덩이를 그려놓은 시계추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과거의 의식과 연결되지 못한 욕망이란 물질문명과 함께 변화하는 것들로 지속적이지 못하며,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불안감만을 더해주는 것이다. 불안한 미래의 시간도 그 중심에서 찾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을 시계 도상의 중심에 사방으로 꽃잎을 흩날리는 꽃을 그려놓음으로써 상징화하고 있다.
시간의 중심에 자리한 것은 무엇인가. <time escape-lamp, 2004>에서 보듯이 그에게는 어린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램프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과거의 시간들이 의식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그에게는 어린시절의 시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번 작품의 이미지들이나 원형의 캔버스 틀에서 보듯이 인간의 규범적 굴레에서 벗어나 문명의 이기 속에서도 초연한 자연의 생명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Time escape - lamp 80x60cm Oil On Canvas 2003
시간으로 떠나는 그의 풍경들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아직은 그의 시간 풍경 속에서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인간이 처음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고 또 그가 보았던 것을 너머서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죽음을 본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최초의 수수께끼였고, 죽음은 인간을 또 다른 길로 접어들게 한다.”고 한 레지스 드브레의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한 이야기들의 이미지들과 마주하게 되지 않을까. 시간의 이미지들과 함께 떠나는 그의 이번 전시는 급변하는 물질문명의 변화 속에서 우리의 의식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사색하게 한다.
Time escape, 163x133cm Mixed Media On Canvas 2002
회색지대 9922, 91x72.7cm Mixed Media 1999
정창균의 작업은 원천적으로 인간과 사회가 갖는 대립과 갈등의 동반자적인 모순률을 중심으로 진전된다.
이를 그는 문명으로 표기하기도하지만 98년 도올에서 보여준 녹슬은 (Smoke-Stained)모습의 날개나 인체의 형상 들과 방독면과 같은 오브제들의 상징체를 통해 그의 시각을 일차적으로 선보였다.
"기억의 편린들이 반짝인다. 현실, 은밀한 욕망과 고통, 갈망과 조바심, 거칠고 음울한 풍경과 경쾌한 삶의 파편들이, 우리의 삶 속에 보편적 진리로..." 라는 그의 작업노트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최근 그의 관심은 공허와 소외,불안감에 기조한 인간의 피페화되어가는 존재의 상실에 대한 논의로 집중되어진다.
그의 화면은 녹슬은 후기산업사회의 회색지대에 생존해가고 있는 인간들이 느끼는 딜레마를 은유하는 일차적인 과정으로부터 비롯되어지며, 흑연과 철분을 주로 구사하면서 채색안료로 이어지는 독특한 재료적인 개념을 동반한다. 전반적으로 98년에 보여준 개념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으로 이해되며,<회색지대1>에서 나타난 작은 공의 의미를 향해 무의미할듯한 삶의 고통을 영위해가는 현대인들의 고독과 치열한 삶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이상과 희열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 공에서 뿐만이 아니라 장미씨리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거울을 통해 나타난 회색장미의 모습은 화려한 형상의 이중구조로 야누스적인 모습에 배어진 우리들의 음영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전반적인 작업에서 작은공의 존재가 여러 형태로 등장되는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정창균이 의도한 화면의 긴장과 대립적인 터널을 구축한 진전으로 해석된다.
이번 작업들은 비교적 다양한 부류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는 9901. 9905 등에서 볼 수 있는 군상위주의 인체작업으로서 비교적 이번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업들이다.두번째는 회색지대 9903~4.6.7.8.11 등으로서 장미가 등장하거나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누드를 그려냄으로서 앞서말한 자아를 일차원적인 매개로하는 존재의 투영을 시도하고 있다.
연이어서 회색지대 9915.9917 은 완전히 회색 장미만을 보여준 예로서 야누스적인 이중구조의 인간상을 말하고 있으며 , 회색지대 9919~9922 에서는 천으로 둘러 쌓여진 인간의 실체를 표상적으로 보여주면서 물질문명의 포로가 된 숨막히는 질식과 그 회색인간들의 꿈을 상대적으로 한 화면에서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회색지대9924 는 마치 신음하는 동물의 모습을 보는듯한 주검의 상징체를 복합적으로 드러내어 그 배반적상황을 간결하게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드로잉으로 보여준 회색빛천으로 드리워진 의자와 허상의 실체들은감금되어진 현대인들의 존재들과 한순간에 허물어져 버릴수 있는 무상한 존재들의 간결성을 엿보게 한다. 위와같은 부류로 비교적 다양한 언어체계를 보여 주고 있는 정창균의 작업은 물론보다 밀도있는 통합언어의 구축을 이루지 못했다는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다.
특히 회색지대 9901과 9905에서 보여준 군상시리즈에서 보여 준 스케일과 흑연에서 구사되는 텍스츄어의 밀도나 주제와 부합하는 심도있는 접근이보다 적극적으로 진전되지 못한것은 과제로 남게되며 장미시리즈에서 보여준 단편적인 문제제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편,의자와 천시리즈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국면의 전환을 시사하는 단순성은 드로잉적인 의미를 동반하고는 있지만 보다 응축된 관류를 시도해 가는 작가의 진지함이 엿보이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어쩌면 집단적인 자기도취와 휴머니즘의 파괴를 거듭해온 20세기를 지나온지도 모른다.그것이 지향하는 목표가 아무리 이상향적인 사회를 전제하고 있더라도,결과적으로 20세기는 가장 소중한 인간의 가치와 자앙를 상실해가는 아픔을 동반하였다.
정창균의 이번 작업들은 바로 이와같은 휴머니즘의 상실에 대한 반성과 의문을 제기하는 작은성찰과 관류의 조형언어로서 이해되어진다.